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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자(無名者) - 프롤로그2장
16-08-22 00:52 1,750회 0건
*************************무명자(無名者)1부. 시련(試鍊)**************************

서장(序章) 2장************************



현성은 어찌 보면 앞만 쳐다보며 열심히, 그러나 결코 서둘지 않고 꾸준히 자신이 걸을 수 있는 길을 걸어온 셈이었다.
그래서인지 7살 연하인 지은과 사귀는 것도 현성이 본격적으로 해보기는 처음이랄 수도 있는 연애였다.

그리고 현성은 국내의 수재들이 모였다는 곳에서도 곧 두각을 나타내기에 이르렀다.
입사한 채 1년도 되지 않아 신제품 기획과 광고를 거의 주도하다시피 한 것이다.
게다가 그 상품이 시장을 뒤흔드는 대박을 터뜨려,
회사의 경영 혁신안들 중 하나였던 당사자 이익 우선 원칙의 첫 번째 수혜자로 이름이 오르게 되었다.

즉 특정 수준 이상의 대박을 터뜨리는 상품의 개발자, 기획자들 중 가장 핵심인물은
그 제품이 올리는 연간 수익의 최대 1%까지,
그리고 크게 기여한 사람은 연간 수익의 0.5%까지 보상금으로 받을 수 있다는 획기적인 보상책이었다.

현성이 기획하고 광고까지 주도한 새로운 휴대폰은 시장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왔다.
달리 새로운 최첨단 기술 같은 게 들어간 것도 아니었으나, 대중심리를 잘 파악한 획기적인 상품이었던 것이다.

정말 대박은 대박이었다. 4개월도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175억 원이라는 엄청난 수익을 올렸다.
나날이 올라가는 판매량의 추이를 볼 때,
분기별로 집계한다면 4분기 동안 600억 원을 무난히 돌파할 것으로 전망되었다.

현성에게는 적어도 5억 원에 달하는 보상금이 지급될 것으로 보였고, 팀장 승진이 거의 확실시되었다.
인사과에서도 현성의 승진을 이미 기정사실로 분류하고 있을 정도여서,
주변에서는 현성을 차기 팀장으로 대우하고 있었다.
그리고 현성을 잘 이끌었다 하여 기존의 팀장도 덩달아 승진이 될 분위기였다.
당연히 팀장은 현성에게 고마워했고,
현성의 근무부서에 수백 퍼센트에 이르는 성과급이 지급될 거라는 회사 측의 발표도 있어서,
현성의 평판과 입지는 무척 굳건해졌다.

현성은 이만하면 자신도 자리를 잡았다는 생각에,
주위 사람들로부터 도둑놈이라는 질시어린 소리를 듣게 만들었던 그녀.
자신의 옛 과외학생이자 7살 연하의 여자 친구 지은에게 정식으로 청혼을 했다.

지은에게는 불감청(不敢請)이언정 고소원(固所願)(주1)이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철딱서니 없는 어린이들이라면 몰라도, 혼인이라는 것은 결코 두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혼인은 집안과 집안의 결합인 것이다.
당연히 양측 부모님의 허락과 상견례가 있어야만 했다.

그러나 이는 별로 어렵지 않게 술술 풀렸다.
사실 현성의 부모님들로서는 허락하지 않을 이유가 전혀 없었다.
현성의 부모님들에게 있어 현성에 대한 신뢰는 거의 절대적이었다.
지금까지 현성은 말썽 한 번 피우지 않았고, 자신이 할 일을 스스로 잘 알아서 해온 믿음직스러운 아들이었다.
초중고를 통틀어 학원 한 번 보내지 않았음에도 줄곧 전교 최상위였고,
대학 들어가서는 등록금이나 생활비 등의 문제로 집에 손 한 번 내민 적 없었다.
그러니 오히려 부모 된 사람들을 미안하게 만들기까지 했던 아들이었다.
그런 아들을 전폭적으로 신뢰하지 않을 부모는 별로 없을 터였다.
그리고 그런 아들이 골라온 여자라고 하고, 게다가 지은이 조신하고 착해 보여서 전혀 반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꼬장꼬장하고 고지식한 아버지와 그에 못지않은 성품의 어머니 덕에,
현성의 집안이 지은의 집에 비해 그리 부유한 편은 아니라는 것이 조금 걸림돌이 되는 듯했다.

그러나 지은의 집안에서는, 지은에게 과외를 처음 시작하던 때부터 현성에게 호감을 보이며,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어조로 종종 현성을 사위 삼았으면 좋겠다고 하던 지은의 어머니가 있었다.
그리고 그런 지은의 어머니의 말은 농담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아주 살짝 운을 뗀 것에 불과했는데도, 대대적으로 환영하며 적극적으로 지원군을 자처해왔던 것이다.

그리고 지은의 아버님은, 현성을 무척 높이 평가하는 현성의 모교 교수와 말이 지인이지, 무척 절친한 사이였다.
자신과 무척 친하고 자신이 신뢰하는 대학교수인 친구가 현성을 높이 평가하고,
지금은 세계적인 대기업에서도 두각을 나타낼 정도의 활약상을 보이는 사람이 현성이었다.
게다가 지은의 어머님의 막강한 지원사격까지 있었다.
덕택에 지은의 아버님에게서도 현성은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었다.

일단 합격점을 받고 나자,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넘쳐, 초면인 사람에게는 자칫 오만하게 비칠 수도 있는 현성의 태도도,
지은의 부모님들에게는 젊은 패기(覇氣)와 남다름으로 보였다.

양가(兩家)는 지은이 대학을 졸업하는 대로 둘을 결혼시키기로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지금은 간단한 약혼 절차만 밟기로 했다며, 지은의 부모님들은 현성의 부모님을 정중히 초대해서 모셨다.
양가 부모님들과 가까운 친지들, 그리고 둘의 친한 친구나 선배들 몇몇만이 모여 현성과 지은은 약혼식을 치렀다.
현성과 친한 선배들은 현성에게 도둑놈이라며 비난 아닌 비난을 보내는가 하면,
지은에게는 어쩌다 저런 놈에게 넘어갔냐면서 장난을 걸기도 했다.

좀 거창하지만 성공과 명예와 사랑을 손 안에 모두 쥐게 되었다고나 할까?
현성에게는 이 모든 것을 거의 온전히 자신의 노력과 땀으로만 해냈다는 자부심이 없을 수 없었다.
이제 앞으로 펼쳐질 성공가도를 계속 달려갈 일만 남은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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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금요일 저녁.

대학시절에 열심히 활동했고,
자신과 지은을 맺어주는 계기가 되기도 했던 동아리의 동창회[Homecoming Day]에 초대받은 현성은
몰려든 후배들과 동기, 그리고 선배들과 어우러져 마음껏 기분을 냈다.
그리고 조금은 놀랐다.
선배들이나 동기들을 중심으로 자신의 근황에 대해서 의외로 얘기가 꽤 퍼져 있었던 것이다.

동아리 행사가 어떻고 새 회장이 어떻고 하는 이야기는 잠시였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현성에 대한 이야기가 화제에 올라서,
마치 현성을 위한 자리로 변해가는 듯한 분위기가 되었다.

너무나 유명해져 이제는 K대학의 전설처럼 전해지는 신입생 적응 지도회[orientation] 때의 일.
만원(滿員) 관중(?) 앞에서 ‘빛살 속의 포옹으로 맺어진 연인들[couple]’의 주인공이 현성이라는 것에
후배들은 대단한 관심을 보였다.
그에 비해, 거의 모두가 동경하는 대기업에 헌성은 채 졸업도 하기 전에 합격했고,
그곳에서도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여 벌써 팀장으로 승진까지 앞두고 있다는 점에 대단한 관심을 보인 것은
현성의 동기들과 선배들이었다.

자신이 한 일을 드러내어 자랑해봤자,
사람들과의 사이에서 결코 좋은 일이 생길 게 없다는 걸 현성은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이 자리는 별로 부담이 없었다.
사실 은근히 드러내어 자랑하여,
다른 사람들로부터 부러움이나 찬탄의 시선을 받고 싶은 마음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부러워하며 축하해주는 선후배들의 인사를 줄곧 겸손하게 받아들이던 현성은
점점 그 자제심의 자물쇠가 풀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결정적인 열쇠는 신입생 적응 지도회[orientation] 때의 그 일을 기억하고 있는 여학생 후배들이 끼워버렸다.
여학생 후배들은 저마다 현성의 근처에 앉거나, 현성과 얘기라도 한 마디 해보려고 들었다.
게다가 현성의 옆자리는 서로 앞 다투어 끼어들어 자리를 차지하려고 들어,
여학생들 간에 약간의 소동이 일어날 정도였던 것이다.

결국 눈에 띄는 동아리 여학생 회원들 중에서는 가장 외모가 돋보이는 여학생이 현성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그리고 마치 그러기를 기다렸다는 듯, 동아리 회장이 나서 자리를 수습하니 소동이 가라앉으며 조용해졌다.
하지만 그 조용함은 몇 십 초도 지속되지 못했다.

신입생 적응 지도회[orientation] 때 현성의 모습을 직접 본 적이 있는 여학생들이
저마다 자신이 본 것들을 떠들어대며 호들갑을 부리기 시작했다.
꼭 자신들이 좋아하는 인기 남자연예인 이야기를 하는 여중고생들이나 극성 팬들을 연상케 하는 광경이었다.
그래도 현성은 그게 그리 거슬리지는 않았고, 내심 흐뭇해지는 마음도 없지 않았다.

현성은 사실 여기에 지은을 데리고 오고 싶었다.
요즘의 지은은 누구라도 지나가다가 한 번쯤은 뒤돌아보게 만들 정도로 화사하게 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친척 어른에게 부모님들과 같이 갔다 와야 한다며 지은이 사과전화를 했을 때 현성은 무척 아쉬웠었다.

그러나 파릇파릇한 여학생 후배들의 관심,
그것도 호감과 동경의 빛이 역력한 관심의 초점이 되는 것도 결코 싫지는 않았다.
오히려 지은과 이 자리에 같이 왔었다면, 현성의 성격상 크게 난처해졌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서인지 지은이 여기에 없어서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까지 아주 잠깐 들어
현성은 자신의 그런 생각에 흠칫 놀랐다.

하지만 결코 바람을 피운다거나 한눈을 파는 것은 아니었기에,
현성은 여학생 후배들이 호들갑을 떨며 서로 따라주려는 술을 사양 않고 마셨다.

그래도 취하지는 않았다.
평소 절제와 자기 관리가 몸에 밴 현성이었기에, 자연스럽게 행해지는 습관처럼 스스로를 제어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껏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막을 이유는 없어서, 현성은 조금 호기를 부렸다.

“여러분, 고맙습니다. 제가 오늘 이 자리 계산을 책임지겠습니다.”

“와아~ 역시 오빠 멋져요~!”

마치 행사장이나 음악회[concert]에 나온 인기가수에게 관중들이 보내는 환호 같았다.
현성은 씽긋 웃으며 마침 옆에 있던 김한수라는 후배에게 제법 과장된 동작으로 자신의 신용카드를 넘겼다.

“가서 계산 좀 해줄래, 한수야?”

“네? 제가 가서 해도 되는 거예요?”

“오~! 벌써 자기 연봉 높다는 거 티내는 거냐? 하하하.”

누군가 싶어서 보니 현성의 1년 선배인 조영훈이었다.
약간의 질시가 섞인 듯도 하고 야유 같기도 했지만, 뒤의 웃음이 앞의 이야기를 농담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어주었다.
현성도 마주 웃어주며 벌써 계산대에 가있는 한수에게 가서는 비용 결제(決濟)를 마무리했다.

자리로 돌아온 한수는 무언가를 뒤적거리더니
평소 존경하던 선배님인 현성을 위해 준비했다며 선물 상자를 하나 내밀었다.
대놓고 존경한다 어쩌고 하니 낯간지럽기도 하고, 선물이라니 미안하기도 해서 현성은 극구 사양했다.
그러나 형을 생각하는 마음에 준비한 것인데 이리 사양하시면 후배가 상처받는다는 한수의 거듭되는 말에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어서 고맙다며 받아들었다.
한수는 바로 풀어보시라며 현성을 채근했다.
사실 궁금하기도 해서 상자를 풀어봤더니,
아직 학생인 한수로서는 좀 무리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의 고급 디지털 카메라가 나왔다.

고마웠지만, 사실 좀 미안하기도 해서 뭐라고 말해야 할지 잠시 생각하던 현성에게,
한수는 지금 바로 현성의 얼굴을 한 번 찍어보시라며 자꾸 권했다.
약간 등 떠밀리듯 찍어보았는데 술기운과 좋은 기분 탓인지 얼굴이 조금 불그스름하게 나왔다.

뒤이어 선배들 모두에게 후배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적었다며,
회장이 나서서 곱게 말려 포장된 큼직한 종이 같은 것(주2)을 졸업생들 각자에게 하나씩 선물했다.

왁자지껄한, 그리고 기분 좋은 작별 인사를 나누고 현성은 자신의 오피스텔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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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가는 도중에 현성은 건물 구석에 뭔가 있는 것을 보았다.
그건 서로 꼭 붙어 앉아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여학생 두 명이었다.
완연한 봄이라지만 아침저녁이면 아직 공기가 무척이나 쌀쌀한 시기였다.

예전의 현성 같았으면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그러나 저런 불쌍한 애들을 보살피는 것이야말로 성공한 남자로서 어울리는 처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척이나 어려 보였고, 또 꽤나 귀엽고 예뻐 보이는 외모가,
술이 들어가 조금 판단력이 약해진 현성의 감성을 자극한 탓도 있었다.

그것이 완벽남이라는 평판까지 듣던 현성과 어울리지 않는 첫 번째 실수였다.
그 평판이 질시 섞인 비아냥거림인지 아니면 찬탄인지는 별개의 문제였지만.

자신들에게 관심을 보여주는 사람이 단정한 복장에 괜찮은 얼굴을 한 사람인 탓일까?
그다지 큰 경계심을 보이지 않고 그 아이들은 현성의 말에 고분고분 답했다.
배고파요, 라고 얼굴에 씌어있는 듯한 그 여학생들은 알고 보니
전라도 해남에서 가출해 이곳 서울까지 올라온 여중생들이었다.

현성은 가능한 한 자상한 얼굴과 말로 그 아이들을 달래고는,
얼른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따끔하게 혼내려고 했다.
그러나 조금 겁을 먹은 듯 현성을 빤히 바라보는 그 눈빛에 현성은 조금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가출하여 지금까지 고생했다는 것임을 보여주는 듯 조금 꾀죄죄했지만 그 외모는 상당한 것이었다.
그러자 현성은 어린 여학생의 외모에 흔들리는 자신을 느끼고 조금 당황했지만,
술 탓이라며 자위하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얼른 집으로 가지 않으면 큰일 당할 수도 있어. 얼른 집에 가야 되는 거야. 알겠니?”

현성은 조금 따끔하게 짐짓 큰소리로 여학생들을 야단쳤다.

여학생들은 움찔 놀라더니 이윽고 슬픈 얼굴이 되더니 울먹이기 시작했다.

“…저희도 그러고는 싶지만… 지금… 집에 갈 차비도 없는 걸요. 훌쩍.”

그런 소녀들의 모습에, 현성은 아까 자신이 크게 소리 지른 게 괜히 미안해졌다.
괜한 자책감을 숨기려고 애먼 여자애들에게 화낸 자신이 더 한심하게 생각되면서 소녀들에게 더 미안해졌다.
하지만 여기서 멋 한 번 부려서 만회해야겠다는 좀 유치한 호기(豪氣)도 생겨서
현성은 소녀들에게 염려 말라고 큰소리 쳤다.

현성의 머릿속에서 계산기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전라도 해남까지의 두 사람 차비와 식비까지 해결해주려면,
대충 계산해 봐도 넉넉잡아 10만원은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왔다.
역시 계산도 빠르다고 우스개로 자화자찬을 하며 현성은 지갑을 꺼냈다.
그런데 속을 열어보니 그의 지갑 속에는 현금이 얼마 없었다.
현성은 조금 당황했다. 이럴 리가 없었다.
오늘은 현금을 15만원 들고 나왔고, 모임에서는 카드로 계산을 했으니 현금이 모자랄 리가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럴 리가 없는데, 이상한데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런다고 해서 없던 돈이 지갑에서 튀어나올 리는 없었다.

게다가 자신이 큰 소리를 탕탕 친 여학생들이 바로 옆에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현성은 얼른 표정관리를 하며,
마치 처음부터 이러려고 했다는 것처럼 태연하게 카드를 꺼내, 인근 현금인출기에서 현금을 뽑으려고 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기계를 바꿔가며 몇 번이나 넣어봐도 카드가 잘못된 것인지 도통 인식이 되지 않았다.

잔뜩 큰소리는 쳐놓았는데 일이 이렇게 되자,
여자애들에게 자신이 괜히 허풍을 떠는 한심한 놈처럼 보였으리라는 생각에 현성은 머쓱해졌다.
면피(免避)용 약속이나 허풍 섞인 허언(虛言)을 경멸하던 사람이 현성이었다.

살짝 여자애들의 얼굴을 살피지 않을 수 없었던 현성은 순간 뜨끔했다.
여학생들의 눈빛에는 슬픔과 함께, 우리를 놀리는 거냐는 원망이 담겨 있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미안하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해서 꽤나 당황한 현성은 자신의 오피스텔로 아이들을 데려갔다.
일단 재워주고 씻게 해준 다음,
그 다음 날 아침에 카드를 재발급 받거나,
그게 좀 번거로우면 통장에서 바로 돈을 찾아서 줄 생각이었다.

이것이 현성의 두 번째 실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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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스텔에 들어가서 불을 켜니 어두운 데서도 눈에 띄던 그중 한 명의 외모가 한층 돋보였다.
참 예쁘네 싶어서 잠시 바라보던 현성은 우선 좀 씻게 해주시면 안 되냐는 소녀들의 부탁에 퍼뜩 고개를 흔들었다.
정신이 드니 현성은 여자애들의 겉옷이 저리 더럽다면, 속옷도 그만큼 더러워졌으리라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그래서 우선 더러워진 옷이랑 전부 세탁기에 넣어서 빨고 방 안에서 말리면 내일까지 마를 테니,
옷부터 세탁하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
그리고 현성은 혹시나 엉뚱한 오해를 살까봐,
여자애들이 오늘밤 입을 옷을 방에서 찾아보는 동안,
여자애들이 각자 알아서 옷을 세탁기에 넣고 욕실로 들어가서 문을 잠그라고 했다.

현성은 자신의 방에 들어가서 소녀들이 입을 만한 옷들을 골랐다.
세탁기가 놓여있는 베란다 쪽에서 두런두런 소리가 들리더니,
덜컹, 하고 세탁기 덮개가 닫히는 듯한 소리가 났다.

현성은 여자 친구 지은을 위해 사놓았던 속옷들 중에서 좀 단정해 보이는 것들을 꺼내서 챙겼고,
빨아서 넣어놓았던 자신의 반바지와 박스 티 등을 꺼냈다.
지은에게는 나중에 속옷 새로 사주면 되는 거였으니까.

“욕실 쓸게요, 오빠. 고마워요~”

문 밖에서 여자애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사회생활을 하게 되면서, 어린 여학생들이 자신을 아저씨라고 부르는 것에 익숙해져가고 있던 현성이었다.
그런데 무척이나 귀엽고 예쁜 여학생들이 생글거리며 자신을 오빠라고 부르니 기분이 썩 괜찮았다.
씨익 미소를 머금은 채로, 이제 다 됐나 보다 싶어 나가보니 세탁기 안에 옷이 쌓여 있었다.
세제를 조금 붓고 유연제도 좀 넣고, 묵은 때가 많을 거라는 생각에 온수로 맞추고 세탁기를 돌렸다.

현성은 주섬주섬 여기저기 정리도 하다가 TV도 켜보고 하며 시간이 지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소녀들은 욕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가출해서 떠돌아다니며 제대로 씻지도 못한 탓에 그동안 밀린 때까지 박박 벗기는 거라서 오래 걸리는 것일까?
아니면 조금 어색한 분위기 때문에 오래 걸린다고 느끼는 것인지도 몰랐다.

조금 남아 있는 술기운 때문일까.
현성은 소파에서 잠시 졸았던 모양이다.
아이들이 나가도 되냐고 묻는 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현성이 대답이 없어서였는지, 더 커진 목소리로 다시 소리치는 말에, 현성은 잠시 기다리라고 대답해주었다.
얼른 욕실 앞으로 갔다.
그리고 앞에 수건을 하나 더 깔고 챙겨둔 옷을 놓았다.
그리고 욕실 문을 두들겼다.

“욕실 문 앞에 갈아입을 옷 있으니까 나 내 방에 들어가고 나면 나와서 알아서 골라 입으렴.”

그리고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현성은 문 밖의 일에 아무런 신경도 안 쓰려고 내심 노력했다.

똑똑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

“다 됐니?”

“네, 오빠. 고마워요.”

조심스레 문을 열고 나가보니, 깨끗해져 한층 예뻐 보이는 소녀들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그중 특히 예뻐 보이는 아이는 뭐랄까 송혜교와 김태희를 섞어서 작고 어리게 만들어놓은 것 같았다.
현성에게 특별히 좋아하는 연예인이 있는 것은 아니었고, 그 두 연예인에게 그리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이번에 현성이 주도한 제품의 광고를 위해 광고 모델 관련 자료를 대단히 많이 훑었었다.
그 와중에서 눈에 익숙해진 연예인들이 송혜교와 김태희였던 탓이 컸으리라.

목욕을 한 탓인지, 아니면 진짜로 울었는지 눈물이 맺힌 듯한 눈으로 고마워하는 소녀들의 모습에
현성은 방금까지의 어색하던 기분이 날아가 버리고 뭔가 으쓱한 기분이 들었다.
완벽남이자 성공한 남자는 이래야 하는 거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저기… 혹시… 뭐 먹을 것 좀 없을까요? 죄송해요, 오빠…….”

“그래, 좀 기다려봐. 근데 우선 머리부터 좀 말리는 게 어떠니? 잠시만 기다려.”

건조기[Hair-Dryer]를 소녀들에게 건네준 현성은 윙윙거리는 건조기의 소리를 등 뒤로 하고,
냉장고를 뒤져서 만두 등을 꺼내고, 라면도 가져와서 대충 이것저것 만들기 시작했다.

마침 빨래도 다 끝났는지 세탁기가 삐익 삑 소리를 냈다.

남자인 자신이 여자애들이 입었던 속옷이나 그런 것을 건드리는 건 매너가 아니라고 생각한 현성은
아이들을 불러서 세탁물을 꺼내 각자 옷걸이에 걸어서 널라고 했다.
여자애들은 한 명이 빨래를 꺼내어 털고는,
다른 한 명이 그 옷을 받아 옷걸이에 거는 식으로 서로 도우며, 조심스러운 듯 빨래를 널기 시작했다.

이윽고 만두와 라면 등등 꽤나 맛있는 냄새가 풍기는 야식이 완성되었다.
반찬으로 먹을 김치 등을 꺼내다가, 마침 냉장고에 남아 있던 소주병을 애들이 본 모양이었다.

“저기… 오빠, 이거 너무 많은데… 안주로 해서… 저희가 따라드릴 테니 오빠 술 한 잔 하시겠어요?”

수줍은 듯, 그러나 현성에게 뚜렷한 호의가 담겨있는 얼굴로 배시시 웃으며 말하는 소녀였다.
현성은 그런 아이들이 귀여워 보여, 걔들이 따라주는 대로 받아마셨다.

이것이 그의 세 번째 실수였다.

전작(前酌)이 있었던 현성은 취기가 심하게 오르는 것을 느꼈으나,
그 와중에도 아이들의 잠자리로 자신의 침대를 내주고, 자신은 소파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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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성은 꿈을 꾸었다.

자신의 여자친구, 지은이 자신의 성기를 입으로 애무해주며 사랑한다고 속삭이는 꿈이었다.

그리고 마치 꿈결같이 몽롱한 쾌감을 느끼며 힘차게 사정을 하는 감각까지 느껴졌다.
게다가 얼마나 시간이 지나서인지는 모르지만,
뱃속이 꿀렁이면서 아프다 싶더니 대변을 쏟아내는 꿈까지 꾸었다.

새벽에 언뜻 잠이 깨었다.
흠칫 놀란 현성은 혹시나 해서 속옷을 만져보았지만 젖지 않았다.
그럼 그렇지. 내가 몽정 따위를 할 리가 있겠냐며 현성은 다시 잠을 청했다.

목이 말랐다.
눈을 뜬 현성은 물을 꺼내 마시고 아이들부터 챙겼다.
그런데 아무도 없었다. 퍼뜩 놀라서 베란다를 보니 빨랫줄에 널어둔 옷들도 안 보였다.

잠시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씻고 잘 먹고 잘 자서 몸이 편해지고 깨끗해지니 집에 들어가기 싫었을 수도 있었다.
아마 그래서 몰래 새벽에 나간 건 아닐까 하는 추리로 이어졌다.
그렇게 생각하니 또 나름대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래도 차비 챙겨준다는 약속을 했었는데 그 약속을 못 지켰다는 생각에 찜찜해졌다.
그러나 현성이 약속을 안 지키려고 해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니었기에 그리 기분이 무겁지는 않았다.

‘어이구, 얘들 봐. 청소까지 해놓고 갔나보네.’

그랬다.
바닥을 쓸고 닦은 흔적이 뚜렷했다.
소주병이나 다른 것들도 다 치워져 있었고, 앉은뱅이 밥상도 치워져 있었다.

그으웅~ 그으웅~~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서 베란다에 가보니 세탁기 속에서 뭔가 돌아가고 있었다.

삑 덜컹

일시정지 단추를 누르고 뚜껑을 열어보니 걸레나 수건 같은 것들이 엉켜 있었다.
아마 아이들이 청소를 하고 나서 세탁기에 넣고 돌린 뒤에 나간 모양이었다.

세탁기에 표시된 남은 시간을 보니 세탁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널어놓고 가려면 지각을 할 참이었다.
할 수 없이 그대로 놔두고, 갔다 온 후에 대충 널자 싶었다.
나름 든든하게 아침식사를 잘 차려먹고 가벼운 마음으로 회사로 나갔다.

저마다 현성을 보며 반갑게 인사를 했고, 현성은 깍듯한 예의로 인사를 받았다.
이럴 때일수록 겸손해야 하지 않겠는가. 미소가 저절로 입가에 걸렸다.




◐◑◐◑◐◑◐◑◐◑◐◑◐◑◐◑◐◑◐◑◐◑◐◑◐◑◐◑◐◑◐◑◐◑




웅~

업무를 보던 현성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못 보던 번호다. 누구지?
그래도 업무상 전화일지도 모르니 안 받을 수는 없었다.

“네, 여보세요?”

[채현성 씨 되십니까?]

들어본 적이 없는 낯선 목소리의 남자였다.

“네, 그렇습니다만… 누구신지요?”

[강N 경찰서 박지상 반장입니다. 좀 여쭐 게 있어서요. 거주하시는 곳이 강N D 오피스텔 406호 맞습니까?]

경찰서? 경찰에서 날 왜 찾지?

“네, 그런데요. 그런데 무슨 일인가요?”

[아아, 아닙니다. 조사 과정에서 댁의 주소가 관련된 게 일부 나와서 확인차 걸어봤을 뿐입니다. 거기 회사인가요?]

“네, 그렇습니다만….”

[네, 협조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러더니 현성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일방적으로 전화가 끊겼다.

뭐지, 이거?

왜인지 모르게 좀 찜찜한 생각이 들다가,
이윽고 뭐 이런 무례한 사람이 있나 싶어서 불쾌감이 들기도 했다.
조금은 복잡한 느낌에 현성은 수화기를 그대로 든 채로 잠시 전화기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겠지.
경찰이니 자신들은 일반인들 위에 군림한다는 특권의식에 이리 고압적일 수도 있겠고,
취조 심문이 일상이다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아마 장난전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기울어졌다.
경찰에게 주목 받거나 조사 받을 일은 한 적도 없었고, 할 생각도 없으니까.

피식 쓴웃음을 머금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순간 희미한, 그러나 분명하게 온몸을 덮어오는 오한이랄까 그런 느낌이 갑자기 현성을 뒤덮었다.
잠시 진저리를 치면서 어깨와 팔뚝을 문질렀더니 으슬거리는 듯한 불쾌감은 곧 사라졌다.
그랬더니 마치 현성을 둘러싼 공기 전체가 무거워져서 현성을 욱죄는 듯한 묘한 느낌이 엄습해왔다.

뭐지 이게? 왜 이래?

양어깨를 몇 번 추어올리고 팔도 가볍게 몇 번 돌려보다가, 다시 목을 이리저리 빙빙 돌려보기도 했다.
이번에는 가슴이 조금 묵직한 것 같더니 다시 목 뒤로 묘한 느낌이 올라오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현성은 잠시 휴게실로 나가서 커피를 한 잔 뽑아 마시고는, 다시 돌아와 자료를 훑어보며 하던 일을 계속했다.
그때의 현성은 생각지도 못했고 알지도 못했다.
직감(直感)과 본능이라는 것은 때로는 이성(理性)과 논리(論理)를 초월할 수도 있다는 것을. (계속)



◆미주(尾註)********************************
주1) 불감청고소원(不敢請固所願) : 감히 드러내어 요청하지는 못하지만, 속으로는 원하고 있음
주2) 이런 걸 롤링 페이퍼라고 얘기하곤 하는데, 이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어원이나 자세한 의미를 물어보았더니, 각자 돌아가면서 할 말을 적는 종이라는 뜻에서 rolling paper라고 한다는 대답이 많이 돌아왔다. 그러나 영어권에서 rolling paper는 담배, 잎담배 등을 둥글게 말 때 사용되는 종이라는 뜻으로 통하고 있다. 연판장(連判狀)이나 전언판(傳言板)이라는 말은 너무 무겁고, 돌림종이나 수다담이라는 우리말로 대체하는 것은 어떨까?



◆글쓴이의 변(辯)*****************************************************************
관심과 성원 보내주신 분들, 정말 고맙습니다.
비문(非文)이나 오타, 오류, 지적하거나 건의하고픈 부분 등이 있으시면 언제든지 가르침 주시기 바랍니다.
제 작가집필실의 자유게시판을 이용해주시거나 덧글로 써주십시오.
아참, 제 글에 대한 잡담성(?) 감상 등도 환영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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