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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자(無名者) - 프롤로그1장
16-08-22 00:51 962회 0건
************************무명자(無名者)*********************************


********책임회피***********

이 글 속의 등장인물들은 현실 속에 있을 법한 인물들을 상정하여,
몇몇 사례들을 바탕으로 하여 제가 가공한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 인물과 사건 등이 많이 들어가 있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소설적인 재구성을 거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글 속의 몇몇 인물들이나 단체들이
실제의 어떤 인물이나 단체를 떠올리게 하는 경우가 있다 해도, 그것은 현실과는 다릅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는 순전히 우연의 일치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해둡니다.

무술, 전통의술 등에 대한 묘사는 가능한 한 현실에 바탕을 두려고 했습니다.
특히 의술과 무술에 대한 내용들은
각각 실제 침구(鍼灸), 무술의 달인들이 제공해 주신 경험담들,
그리고 실제의 수련 내용과 기술들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이 모두 있는 그대로 이 글에 묘사된 것은 절대 아닙니다.
제가 그 내용들을 다 이해하여 잘 풀어 묘사한다는 것은 사실 무척 지난(至難)한 일이기도 하고,
누군가의 오해나 왜곡, 악용 등의 문제도 뒤따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명(實名) 등은 가능한 한 숨긴다는 전제 하에 받은 내용들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또한 제가 글로 풀어서 쓰기에는 너무 어려운 수준이거나 공개하기에 곤란하거나 한 것들은
적당히 소설적인 과장과 허구로 덧칠하여 눈속임을 했다는 것을 분명히 해둡니다.
물론 그 과장과 허구를 소중한 조언을 해주셨던 한 선생님에게 미리 보여드렸더니,
‘이론적으로는’ 충분히 가능할 법도 하고 재미있는 발상이라는 말씀도 듣긴 했습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소설은 소설이므로,
제 소설에 묘사된 것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곤란합니다.
특히 소설 속 침구(鍼灸) 처방을 따라하여 아픈 사람에게 시술해본다거나,
무술의 수련법, 기술 등을 함부로 따라한다거나 하는 일로 인해 생길 수도 있는 사태에 대해서
절대 저는 책임질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밝혀둡니다.

도움을 주신 분들의 이름을 표기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제 부족한 글로 인해 만에 하나 그분들에게 피해가 갈 것을 우려하여 모두 생략했습니다.
그 중에는 양지(陽地)에 드러나지 않는 세계에서 일하시는 분들도 있어서 더더욱 그렇지요.
교도소 관련 내용들을 조언해주신 전(前), 현직 교도관과 경비교도대 출신의 대학 후배 ㄱ군,
모 법률 사무소의 ㅁ 소장님 등에게도 감사인사를 드려야 맞겠지만,
역시 앞서 말한 이유로 실명 공개를 하지 않았습니다.

비문(非文), 비속어(卑俗語) 등을 결코 사용하고 싶지는 않지만,
각계각층의 등장인물들이 저마다 올바른 언어만 사용한다는 설정은 정말 터무니없지요.
그래서 등장 인물의 지적 수준, 환경, 성격 등에 따라,
특정 인물의 대사에는 비속어(卑俗語)와 비문(非文)이 난무할 수도 있습니다.
이 점 미리 말씀드리며 양해를 구합니다.

참고로 외국에서 수입한 배타적 유일신앙을 절대 진리로 숭배하시는 분들,
그리고 한국의 역사와 전통에 회의적인 분들은 이 글을 읽지 마실 것을 권합니다.



*************************무명자(無名者)1부. 시련(試鍊)**************************
천지(天地)와는 달리 인(人)은 상보(相補)하지 않으려 한다.


서장(序章)************************



채현성(蔡炫晟)은 훤칠한 키는 아니었지만,
평균치는 좀 넘는 키에다가 근육이 보기 좋게 붙은 몸매였다.
눈에 확 띄는 미남이라고는 절대 말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제법 괜찮다 싶은 느낌 정도는 줄 수 있는 얼굴을 갖고 있었다.

책이 잔뜩 있는 집안 환경에서 늘 책을 읽는 모습을 보여주던 부모님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현성은 어릴 때부터 책을 많이 읽었다.
그래서였는지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 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머리도 좋고 학업에도 충실해서 성적도 아주 좋았다.

언제 형성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은 현성의 왕성한 지식욕(知識慾)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덕택일까?
명문대에 가기 위해서는 다들 한 번 정도는 받아야 한다는 과외를 현성은 한 번도 받아본 적 없었다.
학원 역시 가본 적도 없었지만, 국내 유수의 명문대학에 비교적 무난하게 들어갔다.
사실 학원에 갈 필요가 없었기에 현성의 부모님도 굳이 보내려 하지 않았다는 말이 더 옳았다.
그리 넉넉하지는 않은 현성의 집안 형편상 그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소위 말하는 명문대학에 장학금을 받고 들어갈 정도의 성적은 아니었지만,
일단 대학에 들어간 후에는 현성은 성적 우수자에게 주는 장학금을 받아냈다.
자기 관리에도 철저하여 술이나 유흥에 빠지지 않았고 항상 적당한 선을 유지하였다.
또한 중고등학교 시절보다 훨씬 개인 시간을 많이 낼 수 있어서,
어릴 때부터 해온 무술을 본격적으로 더 해서 합기도와 태권도에서 4단씩을 따서 사범 자격을 획득했다.

그토록 건강했던 덕분인지, 아니면 병무청의 신체검사가 허술한 데가 많아서인지,
현성은 입영을 위한 신체검사에서 1등급을 받았다.
현성의 아버지는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잘 수행하고 오라며 현성의 등을 두들겨주었다.
평소 고지식하다는 말을 들을 정도이고 애정표현에도 서툰 편인 부친다운 태도였다.

현성은 합기도와 태권도의 단증 때문에(덕분에?) 특전사로 차출되어 현역으로 군복무를 했다.
그렇게 군복무를 마치고 전역하고 나니, 조금 애매했다.
복학 시기가 맞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1년 정도의 시간이 남았던 현성은
그 시간에 닥치는 대로 시간제 일도 하고 과외도 해서 돈을 모으며 열심히 공부했다.
가장 열심히 공부한 것은 외국어였다.

복학한 현성은 학교 공부에 더더욱 전념했다.
전공 공부 외에도 복학 이전부터 공부하던 외국어를 열심히 공부해,
흔한(?) 해외 어학연수 한 번 가지 않고서도 독학으로 2개 외국어를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거의 만점에 가까운 우수한 성적으로 총장의 표창까지 몇 차례 받으며,
교수들의 신뢰와 학우들의 찬사를, 때로는 약간의 질시어린 시선도 받았다.
학과 사무실 게시판 등에 붙는 성적 우수자 등의 명단에는 항상 현성의 이름이 제일 위에 있었다.

이렇게 호감형의 조건을 꽤나 갖추었음에도 현성은 여자에게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몰래 숨겨놓은 부인이 있다거나,
벌써 유치원에 다니는 애가 있다는 소문까지 학우(學友)들 사이에서 잠시 돌았었다.

하지만 특별히 현성이 여자들을 멀리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고,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것뿐이었다.
굳이 현성이 변명(?)을 한다면,
현성 자신이 목표로 하던 것에 몰입하다 보니 다른 곳에 별로 눈이 가지 않았다고나 할까?

학교와 도서관에서 자취방,
그리고 학교 동아리방과 동아리 수련실로, 다시 과외 교사 일만을 오가는 현성의 일상은 시계추처럼 정확했다.
그래서인지 가끔 현성에게 재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현성도 그런 말들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현성으로서는 그런 것에 신경 쓸 이유는 없었다.
타인이 자신의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 없지 않는가.
그러니 각자 자신의 신념대로 살며
그 신념의 결과에 스스로 책임을 질 수 있도록 노력하면 된다는 게 현성의 신조들 중의 하나였다.

그런데 그런 현성을 따르며 은근히 추종하는 후배들도 적지 않았다.
그들 중 몇 명은 스스로를 현성의 제자나 후계자가 되고 싶다고 하는 열성파들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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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과 교수와 졸업논문의 마무리 작업을 하던 어느 날이었다.
현성은 생각보다 논문을 일찍 완성했고, 현성을 높이 평가하던 담당 교수는 열심히 현성의 논문을 챙겼다.
지금까지 적잖은 문제가 있었던 논지의 흐름과 인용문 등의 출처 재수정이 드디어 끝난 것이다.

잠시 한 숨 돌리는 도중, 웬일인지 교수가 직접 차를 타와서 현성에게 내밀었다.
얼른 일어나서 두 손으로 받아든 현성을 손짓으로 자리에 앉힌 교수는 차를 몇 모금 마시다가 불쑥 얘기를 꺼냈다.

자신의 지인(知人), 솔직히 말해서 절친한 친구의 부탁을 받았는데,
제자들 중에서 일대일 개인 과외를 해줄 실력이 뛰어난 선생을 구해달라는 거였다.

과외가 필요하다는 학생은 머리도 나쁘지는 않은 편이고 스스로도 공부를 열심히 하는 편이긴 한데,
좀처럼 성적이 오르지 않고 제자리걸음을 하다가 근래 들어서는 오히려 하락추세에 들어갔다고 한다.
그 이전부터 유명하다는 과외 선생을 구해서 열심히 공부시켜 보았지만,
지금까지 별 효과가 없어서 자신에게까지 부탁해왔다는 것이다.
현성의 문장력과 외국어 실력은 교내에서도 제법 알아주는 터였다.
당연히 교수도 그 점을 잘 알던 터라, 친구의 부탁을 듣자마자 그가 떠올린 사람이 바로 현성이었다.

지금 당장 특별히 하는 과외가 없다면 어떻게든 수락해달라고 현성에게 교수가 부탁조로 나왔다.
현성은 그동안 졸업논문 등으로 인해 과외를 다 끊었었지만 이제 졸업논문도 거의 다 끝났다.
그래서 빨리 과외 자리부터 찾으려 했던 현성에게는 마침 시기적절한 고마운 제안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교수의 말대로라면, 그 학생은 어딘가 공부 방법이라든지 기본적인 이해력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런 종류의 문제는 현성이 고심하면 어떻게든 성과를 낼 수도 있을 듯했다.

그러나 가르칠 학생이 여학생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현성은 잠시 난감해졌다.
모든 여학생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철이 없는 것이야 그렇다 쳐도, 싸가지도 예의도 없는 경우가 남학생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래서 현성은 여고생, 여중생을 별로 가까이 하고 싶지 않았다.

편견이랄 수도 있겠지만, 여학생들의 과외를 여러 차례 해보며 겪은 경험에 근거한 사실이었다.

처음에는 고분고분하게 그래도 인사라도 한다.
하지만 좀 지나고 나면 대부분은 맞먹으려고 들었다.
그것까지는 그래도 어찌어찌 넘어갈 수 있었다.
선생과 학생,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아니라,
현성은 서비스 제공자이고 자신은 고객인 것처럼 구는 것도 충분히 수용할 수 있었다.
어찌됐든 사실이 그러했으니까.

그러나 고객도 고객 나름이 아니겠는가.
적어도 서비스 제공자가 특정 서비스의 사용 방법을 설명해주면, 그 사용법은 숙지해야 할 것 아니겠는가.

공부를 가르쳐도 듣는 시늉만 하기 일쑤였다.
1시간 내내 떠들고 써가며 설명한 후, 그 내용의 일부를 물어보면 동문서답이 돌아오는 것은 다반사였다.

한 여고생과의 수업 도중 잠시 사육신(死六臣)에 대한 얘기가 나온 적이 있었다.
혹시나 해서 사육신에 대해 질문을 해보았었는데, 돌아온 대답은 현성을 절망시키기에 충분했다.

“펫 같은 거 잘 기르는 사육(飼育)의 신(神)! 앗싸~! 정답?”

처음에는 심한 장난인 줄 알고 혼을 내야 하나를 잠시 고민했지만,
진짜로 그렇게 믿고 대답했다는 것을 알고는, 현성은 분노를 넘어 좌절감을 느꼈었다.

그 여학생이 유달리 특별한 사례(事例)였을 뿐이라고 생각하기에도 무리였다.
다른 여학생들도 절대 다수가 거의 50보 100보였으니까.

명문대 대학생이면 현성에게는 무슨 특별한 공부 방법이 있을 테고,
돈을 주고 불러온 선생이니까, 자신들에게 그 비법을 가르쳐 줘야만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사실 그런 비법이라는 게 있을 턱이 없었고, 설혹 있다 해도 개개인마다 차이가 있는 것은 당연했다.

그래도 어떻게든 성적은 올라가게 해야만 했다.
그래서 조금 엄하게 가르치면, 확 삐쳐서는 눈물을 흘리거나 토라지는 것은 예사고, 대들며 따지기까지 했다.
한 번 두 번 참다가, 이러면 이 학생 앞으로 큰 일 나겠다 싶어서 목소리를 높여 야단을 쳐보기도 했다.
그리고 그 다음 날에 현성은 학생의 부모로부터 통보를 받아야만 했다.
오늘부터 안 와도 된다거나 오지 말라는 통보.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서, 어르고 달래어 친해져서 공부로 이끈다는 방식으로 바꿔보기도 했다.
하지만 역시 잘 되지 않았다.
현성과 무슨 연애라도 하자는 것인지 민소매 상의나 작은 반바지를 입고 배시시 웃으면서 몸을 꼬는가 하면,
강의를 하다가 궁금한 게 있으면 질문하라고 했더니,
선생님의 첫사랑은 언제고 첫 키스는 언제 해봤냐는 그런 질문이나 해댔다.

남학생이면 호되게 한 번 두들기거나 허심탄회하게 얘기라도 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여학생들은 생글생글 웃기까지 하며 겉으로는 전혀 내색 않으면서,
뒤에서는 친구들을 통해 나쁜 소문을 만들어 퍼뜨리는 등 골치가 아팠다.
심지어는 자신에게 추근대다가 잘 안 되니까 과외 시간에 심술을 부리더라는 소문까지 듣기도 했다.
그렇게 몇몇 여고생, 여중생에게 호되게 데인 뒤로는,
현성은 과외를 할 때도 가급적이면 여학생은 피해왔었다.

그러나 이번은 교수님의 주선이었다. 거절하기가 쉽지 않았다.
결정적이었던 것은 지금까지 받던 과외 보수보다 대략 2배 이상의 보수가 보장될 거라는 교수의 후속타였다.

승낙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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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성은 자신이 가르치게 될 학생의 집에 와보고 좀 놀랐다.
엄청나게 부자라거나 주택 부지나 주택의 크기가 대단하다거나 하는 그런 것과는 별 상관이 없었다.

정원에서부터 시작해서, 집의 외부나 내부 장식까지 뭔가 확실히 다른 점이 있었던 것이다.
돈으로 쳐 바른 그런 천박한 느낌 같은 게 아니었다.
분명 고급스럽기는 한데, 사치스럽다는 느낌이 아니라 단아하고 깔끔하다고나 할까?

가르치게 될 학생이라는 여고생 최지은 역시 뭔가 한참 달랐다.
다소곳이 인사를 하는 태도에서, 형식이 아닌, 예의가 몸에 밴 학생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날 하루 가르쳐보고 현성은 자신의 느낌에 좀 더 자신을 가질 수 있었다.

한 마디로 싸가지가 있고 개념도 제대로 박힌 여학생이라고나 할까?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라도 더 배우고 하나라도 더 알려는 의지가 뚜렷해 보였다.
절대로 부모님이 억지로 시켜서 마지못해 공부하는 흉내를 내는 그런 학생이 아니었다.

분명 지은은 스스로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었다.
성적표를 보아도 전체적으로 성적도 중상위권이었다.
하지만 다른 과목들은 전부 최고등급을 오르락내리락하는 반면, 영어와 언어는 상대적으로 바닥이었다.

뭐가 문제일까?

지금까지 그런 문제 때문에 수많은 유명 과외교사들을 초빙했지만, 전혀 효과가 없었다고 했다.
오히려 2학년이 끝날 때까지 언어와 영어의 평균이 조금씩 내려가고 있었다.
그러니 지은의 부모님들은 위기감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고,
높은 보수를 걸고 진짜 과외 실력이 뛰어난 선생을 찾고 있었던 듯했다.

단 하루 가르쳐본 것뿐이었지만, 현성은 지은이 게으르거나 머리가 나쁜 학생은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날 가르친 수업 내용을 20분에 걸쳐서 질문해보니 절반 이상을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지간한 머리를 갖고는 되는 것이 아니었고, 머리가 있다 해도 집중력이 없으면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지은에게는 공부 방법이나 시간 배당 등에 문제점이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현성은 지은의 공부 방법을 면밀히 관찰하고, 필기 습관이나 정리 습관 등등을 세밀히 검토했다.
아니나 다를까 지은은 공부 방법에 문제가 있었다.
핵심이 되는 중요 내용들을 하나하나 암기장처럼 정리하여 반복해서 보는 것이 지은의 공부 방법이었다.
그런 지은의 공부 방법을 현성은 거의 강제적으로 모두 파기해버렸다.

지은도 다급했던 모양인지 현성의 다소 과격한 결정에 거의 아무런 불만도 표하지 않고 따라왔다.
그건 아마도 현성의 자신만만한 태도와,
자신의 아버지의 친구분이라는 그 교수님, 그것도 국내 굴지의 명문대라는 K대의 교수님의 추천을 받아서 모셔온 선생님이 현성이라는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현성은 지은에게 문장과 문단을 빠르게,
그리고 나아가서는 책 전체를 통째로 처음부터 끝까지 무조건 다 읽게 했다.
그런 일견(一見) 무모해보이기도 하는 방법을 몇 번 반복하여 숲 전체, 즉 책 전체의 구조를 파악하게 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그 책의 세부내용들을 지은이 암기장 만들던 방식으로 하나하나 정리하게 했다.
처음 방법은 지은이 좀 힘들어했지만, 힘든 걸 억지로 하게 한 후에,
지은에게 익숙한 방법을 다시 반복시키니, 지은은 엄청난 속도로 진도를 나아갈 수 있었다.

이는 숲 전체를 반복하여 보게 하여 전체 구조를 파악하게 한 후,
다시 숲 속에 들어가서 나무의 모양을 하나하나 파악하게 함으로써,
숲의 내부와 외부를 전체적으로, 그러나 골고루 이해시키고자 하는 의도로 현성이 고안한 것이었다.

이런 현성의 접근방법은 지은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과외를 한 지 한 달 남짓 지나자 바로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지은의 부모님들은 현성에게 무척 고마워했고,
지은 역시 가슴이 새카맣게 타들어갈 정도로 고민했던 점을 해결해준 현성에게 고마워했다.
원래 예의 바르고 착한 지은이었지만, 현성을 대하는 태도가 눈에 띄게 더 공손해졌다.

지은의 공손한 태도와 성심성의껏 배우려는 자세는 현성의 경계심이 조금씩 풀리게 했다.
그런데 여학생을 꺼리는 마음과 조심스러움이 옅어지니 문제 아닌 문제가 생겼다.
이전의 골칫덩이 여학생들과 명백히 대조되는 지은에게 경계심이 풀리는 차원을 떠나 호감이 생기면서,
지은의 뽀얀 피부와 가느다라면서도 길고 탄력이 있는 팔다리가 현성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지은은 외모와 성격, 어떤 점에서도 남자애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게 이상할 정도의 매력이 있었다.

그러나 맡은 일에 책임을 다하지 못하면 부끄러운 일이기도 했고, 솔직히 보수에 대한 욕심도 있었다.
현성은 최대한 지은을 학생이자 제자로 대하며, 성심성의껏 공부만 가르치려 애썼다.

다행히 현성이 교정해준 공부 방법에 지은이 재미를 붙이면서 지은의 성적은 점점 올라갔다.
덕분에 지은이 질문해 오는 것에만 답해주면 그만일 정도로 현성은 한가해졌고,
취업을 준비해야 하는 현성 자신의 공부에 훨씬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있었다.
그 덕분일까. 현성은 졸업도 하기 전에 모 대기업에 이미 합격할 수 있었다.
그 기업은 현성을 비롯한 몇몇 졸업반 합격생들에게 대단한 특전을 베풀어주었다.
여름 방학 기간에 맞춰, 회사의 견습 사원으로 일하면서 회사 분위기와 업무의 기본도 익히게 해준 것이다.

새벽에는 운동, 낮에는 견습 사원으로서의 실무 공부, 밤에는 지은의 공부 지도, 그리고 주말에는 특별 개인 지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성의 업무 파악 속도는 빨랐고, 사(社) 측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지은의 성적도 어느 순간을 넘어가면서부터 그 상승에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나날이 올라가는 지은의 성적에 담임교사도 놀라워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지은의 성적으로 이제는 어지간한 명문대에 지원해도 무난히 합격을 기대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진학지도 시간에 담임교사는 지은의 차례가 오자, 별로 지도해줄 것도 없다며 웃으며 보냈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질시가 섞인 부러움의 시선을 보내는 친구들도 있었겠지만,
지은은 현성이 다니는 대학의 국어교육과를 선택했고, 무난히 합격하는 선을 넘어 장학금을 받으며 합격했다.
이 희소식은 바로 현성에게 전해졌고, 현성은 자신이 합격했을 때처럼 기뻐했다.
지은의 부모님은, 이전에 현성에게 주기로 했던 액수보다 훨씬 더 많은, 꽤나 파격적인 보수를 지불해주었다.

현성이 그때까지 단 한 푼도 허튼 데 쓰지 않고 꼬박꼬박 모은 돈은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었다.
그리고 현성의 부모님에게 있어 현성은 등록금은 물론 생활비도 보태줄 필요가 없었던 아들이었다.
그래도 현성의 부모님은 등록금과 용돈을 준다는 생각에 어떻게든 돈을 모으고 모았다.
이제 그 돈을 모두 현성에게 건넸고, 현성의 집안 형편에 비추어 보면 그 돈은 거액이랄 수도 있었다.
그 돈으로 현성은 자신의 근무처 바로 근처에 꽤나 괜찮은 오피스텔을 전세로 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은으로서는 자신의 문제점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교정해준 선생님.
그래서 마침내 자신의 성적 고민을 후련하게 해결해준 선생님.
마음속으로 고마움을 느끼던 그 선생님이 다니는 대학,
우리나라에서도 명문대라고 일컬어지는 K대학에 합격한 것이다.

그리고 그 선생님이 제법 괜찮은 외모까지 갖춘 데다가,
지은의 아버지의 친구분이시라는, 이제 자신의 모교이기도 한 K대학의 교수님이
입에 침이 마르게 현성을 높이 평가하며 칭찬하는 것도 들은 적이 있었으니,
어린 지은의 마음이 현성에게 기우는 것도 그리 이상한 건 아니었다.

현성과 지은은 서로 전화번호를 알고 있었다.
과외 시간 변경에 대해 알려주거나 급한 질문 등에 답해주려면 서로 필요했으니까.
그렇지만 입시가 끝나면서 과외가 종료된 후에도 지은은 꾸준히 현성에게 문자를 보냈다.
지은을 마음속에서 지울 수 없었던 현성이었기에, 현성은 지은의 문자가 반가웠고, 계속 답장을 보냈다.

하지만 둘 사이는 거기까지였다. 더 이상의 진전은 없었다.
그것은 자신이 가르치던 여학생과 사귄다 어쩐다는 생각을 하니,
왠지 현성 자신이 여학생 제자에게 침 흘리는 변태 선생이 된 듯한 느낌에 불쾌감을 갖기 시작한 탓이 컸다.

그런 불쾌감을 견디지 못하게 된 현성은 전화기를 바꾸면서 전화번호도 바꾸어버렸다.
회사와 친한 선후배와 친구들, 부모님에게만 전화번호 변경을 알리고, 지은에게는 아무런 통보도 하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야 그 불쾌감이 사라졌다.
현성의 성격은 자신이 정한 규칙에서 스스로가 벗어나는 것을 절대 합리화하지 못했다.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타인에게는 너그럽다고나 할까?
어쩌면 자신에게 피해가 오지 않는 이상은 타인에게 무관심하다는 것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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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성은 최우수 학생으로 재학 중 총장 표창을 3번이나 계속 받았고, 졸업식에서 졸업생 대표로 고별사도 하게 되었다.
뭔지 모를 뿌듯함이랄까 그런 것이 가슴 속에서 솟는 것 같은 느낌에 현성은 마음이 벅찼다.
대학에 입학한 이후로 부모님의 도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거의 혼자 힘으로 여기까지 해낸 것이다.
뿌듯한 마음으로 졸업식의 여운을 곱씹고 있던 현성에게 동아리 후배들로부터 연락이 왔다.
신입생 적응 지도회, 즉 오리엔테이션(orientation)에서 개막 행사의 일환으로 동아리 시범을 할 건데,
OB(Old Boy : 졸업생) 자격으로 도와주시면 안 되는 거냐는 거였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현성 스스로 연락을 끊기는 했지만 사실 지은에게 미련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이라면 지은도 올 테고,
어떤 식으로든 재회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아주 없지는 않았던 현성이었다.
평소의 현성이었다면 그런 우연에 기대는 심리를 비웃었을 테지만,
그때만은 현성에게도 그런 기대가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현성이 후배들에게 가르치던 것들이 대부분이기도 해서,
동아리 후배들과 함께 1주일 정도 연습을 하니 비교적 쉽게 손발을 맞출 수 있었다.

행사 날, 오리엔테이션 행사장인 체육관의 무대로 올라간 현성은 회장의 부탁을 받고,
도복에 검은 띠를 잘 매고는 대표로서 간단히 인사를 하려고 나왔다.
조명실에서는 미리 연습한 대로 현성을 집중해서 비춰주었다.
현성은 두어 번 호흡을 가다듬고 마이크를 몇 번 고쳐 쥐었다.

“안녕하십니까, 신입생 여러분. 저희 동아리는…”

“선생님?”

어째서였을까?
현성의 귀에 그 목소리가 그대로 꽂혔다.
현성에게 무척이나 낯익은 목소리였고 내심 그리워했던 목소리였으며 또한 반가운 목소리였다.
이것이 칵테일파티 효과(주1)라는 걸까?
현성은 마이크를 든 채로 그대로 굳어버렸다.

소리를 질렀던 사람인 듯 객석에서 누군가 벌떡 일어섰다.
다들 앉아 있던 터이니 유독 그 사람이 두드러져서 모든 사람들의 눈이 그쪽을 향했다.

“선생님!”

어지간한 장소에서도 바로 눈에 띄는 외모와 몸매를 가진 지은이었다.
그런 지은이 다들 앉아있는 곳에서 혼자 일어서서 재차 누군가를 부르며 소리치는데 눈에 안 띌 수는 없었다.

“지은아…”

현성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마이크를 든 채였기에, 무심코 중얼거린 현성의 목소리는 체육관 전체에 대형 스피커로 생중계(?)되고 말았다.

지은은 자리에서 나와 가운데 복도로 나오더니 바로 무대 쪽의 현성을 향해 달려왔다.
두근거리는 자신의 심장이 무슨 바보 같다고 현성은 생각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달려오는 지은의 모습만 눈에 가득 들어올 뿐, 현성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듯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현성을 추종하던, 눈치 빠른 동아리 후배 두 명이 잠시 눈빛을 교환하는 것 같더니,
얼른 무대 아래로 뛰어 내려가 지은이 딛고 올라가기 쉽게, 서로 양손을 깍지 끼고 받침대를 만들었다.
마치 다들 사전에 연습한 것처럼 지은이 그 손을 딛고 무대 위로 뛰어 올라오고 있었다.



지은이 바로 눈 앞 무대 위로 올라오자 현성은 자신도 모르게 양팔을 벌리고 있었다.

끼잉~~

마이크를 통해 체육관에 잠시 잡음이 번졌다.
현성은 퍼뜩 정신이 들었다. ‘지금 내가 무슨 추태를…’ 하는 생각이 들면서 얼른 자세를 고치려 했다.

그러나 때는 늦었다.
지은은 이미 현성의 품에 뛰어들고 있었다.
얼떨결에 지은을 품 안에 안은 현성은 자신과 지은의 주변에만 조명이 비치고 있는 것을 알았다.
그 외에는 온통 조명이 다 꺼져 있는지 관객석은 보이지도 않았다.
조명감독이 눈치가 있는 사람이었는지, 아니면 장난으로 그랬는지는 몰라도,
두 사람에게 조명을 집중시킨 모양이었다.

“와아아아아아~~”

“휘익~ 삐익~~”

“멋있다~ 와~!”

쥐 죽은 듯이 조용하던 체육관 안이 환호와 박수로 가득 찼다.
신입생들과 학교 관계자들이 다 모인 오리엔테이션 장소에서,
스팟-라이트(Spot-light)를 받으며 졸업생과 신입생이 맺어진다는 유례없는 기록이 하나 생기는 순간이었다.


미주(尾註)********************************
주1) 칵테일 파티 효과(Cocktail Party Effect) : 다수의 음원이 공간적으로 산재하고 있을 때 그 안에 특정 음원, 예를 들면 특정인의 음성에 주목하게 되면 여러 음원으로부터 분리되어 특정음만 들리게끔 되는 심리현상. 양쪽 귀로 듣는 편이 한쪽 귀로 듣는 경우보다 효과가 크다. (이상 네이버 용어사전에서 인용) 아무리 소란스러운 곳, 예를 들어 칵테일 파티 등을 하는 장소에서도 자신의 이름이라든지, 자신이 관심 있어 하는 것에 대한 소리는 바로 자신의 귀에 바로 잘 들려오는 현상을 경험한 바 있을 것이다.


◆글쓴이의 변(辯)*************************************************
오타나 비문(非文) 같은 게 있으면 지적 부탁 드립니다.
이야기의 전개나 세부 설정 등은 아직 유동적이므로,
좋은 의견을 제시해주시거나, 오류 등에 가르침을 주실 분들께서는,
제 집필실의 자유게시판에 글 남겨주시거나 덧글을 달아주시기 바랍니다.
세목경시(洗目敬視)하겠습니다. ^^;;
아참, 제 글에 대한 잡담성(?) 감상 등도 환영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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